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왕(신성 로마 제국) (문단 편집) == 의미 == [[선거군주제]]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왕 칭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, 첫째는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식 전까지의 '''사실상의 황제'''를 의미하는 직위이며, 둘째는 차기 황제로 지명된 '''[[황태자]]'''로서의 의미였다. 게르만족은 고대 시절부터 민회를 통해 중요한 자리의 임명을 결정하는 관습이 있었다.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세워진 [[프랑크 왕국]] 등 여러 게르만 국가에서는 형식적으로라도 선출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. [[카롤루스 대제]] 역시 부분적으로 선출 형식을 거쳐 왕이 되었다. 10세기 동프랑크 왕국 후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각 부족([[공국]])들의 자치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[[루트비히 4세|유아왕 루트비히]]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, [[5대 부족 공국]] 공작들(훗날의 [[선제후]]로 이어짐)의 선출에 의해 [[콘라트 1세]]가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. 이후 유력 제후들의 선거로 왕을 결정하는 관습은 [[독일 왕국]]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.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[[선제후]]들의 선거로 로마왕(독일왕)으로 선출되어 로마왕이 된다. 이후 교황의 대관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 위에 오르게 된다. 이러한 관계는 15세기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가 교황 대관을 받지 않을 때까지 유지된다. 때문에 초기에는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아직 [[교황]]에게 승인(대관식)을 받지 못한, '''사실상의 황제'''를 가리키는 말이었다.[* 이것이 처음 쓰인 것은 11세기 잘리어 왕조 시기의 일이다.] 11세기 [[하인리히 4세]]가 [[그레고리오 7세]]를 역관광 태우고 난 후[* 서임권 투쟁이 한창이었던 당대의 [[교황]] [[그레고리오 7세]]는 하인리히를 까려는 의도로 단순히 '독일왕'(Rex Teutonicorum)으로 칭하였다.]에는 교황 대관식 전 로마왕(독일왕), 교황 대관식 후 황제의 흐름이 정착되었다. 일반적으로 선제후 선거에서 당선되면, 교황의 황제 대관을 받기 전에 먼저 [[아헨]]에서 쾰른 대주교로부터 독일왕 대관[* 카를루스 대제의 도시 아헨에서 [[선제후]] 쾰른 대주교에게 대관 받는다. 그러다가 최선임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의 이의 제기로 16세기 무렵부턴 쾰른대주교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가 대관을 맡는다.]을 받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번의 대관식을 거치게 된다. 또한 아래에 나와 있는 근대 합스부르크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독일왕이 제국의 [[황태자]]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. 황권이 비교적 강했던 초기에는 황제가 자신의 재위 기간 중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해 미리 선거를 치러 아들을 독일왕에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. 초기 [[오토 왕조]] 시절 황제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기 전 [[독일 왕국]] 시절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해 안정적으로 왕위를 세습해 나갔다. 그러나 이후 교황권 및 제후들의 권력이 강해지고 황권이 약화되면서 황제 생전에 선거를 열어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다. 특히 [[대공위 시대]] 이후 [[선제후]]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선거를 통한 후계자 지명 시스템은 무력화되어 황제 생전에 후계자가 지명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. 선제후들은 자신들보다 세력이 약한 가문이었던 [[합스부르크 가문]], [[비텔스바흐 가문]], [[룩셈부르크 가문]]에서 황제를 선출했고, 한 가문이 독점적으로 제위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가문별로 교대로 황제를 선출했다. 이런 시스템은 15세기 [[합스부르크 가문]]이 제위를 세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. 이처럼 독일왕이 의미가 두 가지였기 때문에 두 명의 독일왕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었다. 예를 들어 [[콘라트 3세]] 황제 시절, 콘라트 3세 본인은 황제의 대관을 받지 못해 (사실상 황제로서) 독일왕의 지위에 있었으며,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[[프리드리히 2세]] 역시 (황태자로서의) 독일왕이었다. 그러다가 15세기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 이후 황제와 로마왕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게 된다.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의 하나로 대관을 치러주지 않는 수법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이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었다. 이러한 배경에서 1356년 [[카를 4세]]는 [[금인칙서]]에서 황제 선출 과정에서 교황권의 배제를 명문화하였다. 나아가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제위 세습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 황제가 된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는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식 없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. 이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대관식과는 관계 없이 선출과 동시에 황제가 되었다. 사실 [[대공위 시대]] 직후에도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한동안 황제들이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.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교황에게 대관을 받는 관례가 이어져 왔었다. 그러다가 막시밀리안 1세 때 다시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황제를 칭했고 그의 손자 [[카를 5세]]를 제외하면 이후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없다. 막시밀리안 1세는 아예 황제의 공식 명칙을 '선출된 로마 황제(선출황제)'(Electus Romanorum Imperator)[* [[독일어]]로는 Erwählter Römischer Kaiser.]로 바꾸었고 이 칭호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.[* 때문에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들을 선출황제라 부르기도 한다.]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조차도 자기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황제 선거를 생전에 열만큼 권력이 강하지는 않았다. 황제 생전에 미리 선거를 실시해 후계자, 즉 황태자를 결정하던 제국 초기의 세습 방식은 [[카를 5세]] 때 이르러서 부활했다. [[카를 5세]]는 각지에서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서 제위를 안정시키고자 자신의 통치기간 중인 1530년 미리 후임 황제 선거를 실시하였는데,[* 카를 5세는 친가, 외가를 통해 상속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는데, 본인은 스페인, 프랑스, 이탈리아 등지에서 각종 전쟁을 수행하고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. 따라서 복잡한 독일 문제는 동생에게 위임하여 동생이 독일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작위 중 제위의 바탕인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을 동생에게 넘겼고,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문제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은 전적으로 동생 [[페르디난트 1세]]가 도맡았다. 이어 1530년 미리 차기 황제 선거를 치루어 동생이 차기 황제로서 독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. 카를 5세는 만년에 황제직을 아들 [[펠리페 2세]]에게 물려주려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회수하려 시도했으나, 이미 독일에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다진 페르디난트 1세에 밀려 실패했다. 결국 카를 5세는 제위는 동생에게, 스페인과 [[이탈리아 반도]]의 [[밀라노 공국|영]][[나폴리 왕국|토]] 및 [[합스부르크 네덜란드|저지대 지방]]은 아들에게 양위하고 스페인으로 은퇴했다.] 그 결과 단독후보였던 동생 [[페르디난트 1세]]가 후임 황제로 선출되었다. 페르디난트 1세는 카를 5세 퇴위 후 정식으로 황제 자리에 오를 때까지 로마왕(독일왕)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. 페르디난트 1세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황제의 재위기간 중 차기 황제 선거를 치루어 그 아들이 로마왕에 오르는 전통이 재확립되었다. 선출된 로마왕은 선황이 승하한 후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였다. 때문에 이후 로마왕은 신성로마제국의 '''[[태자|황태자]]'''를 뜻하는 칭호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